형세를 보고 미리 연마하는 공부
“응용하기 전에 응용의 형세를 보아 미리 연마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보경육대요령』 훈련편에서 대종사님께서는 이 조항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혀 주셨습니다.
“모든 일을 당하기 전에 장차 당할 기틀을 살펴서 미리 준비하여, 일을 당한 후에 군색함과 실패함이 없도록 하게 함이라.”
오늘은 이 말씀을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형세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둘째, 미리 연마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셋째, 어떤 심경으로 연마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형세’란 형국과 세를 합한 말입니다. 형국은 일이 벌어지고 변화해 가는 모양과 경로이며, 세는 그 안에서 작용하는 힘과 변화의 흐름입니다.
장차 당할 기틀을 살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답을 미리 정해 놓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입니다.
미 해병대의 계획수립 과정인 MCPP에서도 첫 단계이자 핵심은 문제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지부터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황과 목표, 그 사이를 가로막는 핵심 문제, 주어진 시간과 자원을 다양한 관점에서 충분히 살핍니다.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그 형세에 적중하는 실천 방안도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종사님께서는 큰 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은 몽둥이를 들고 바다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물을 짜 놓은 뒤 바다로 나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물을 짜려면 먼저 잡으려는 고기와 바다의 형세를 알아야 합니다. 큰 고기와 작은 고기, 깊은 바다와 얕은 물, 빠른 물살과 잔잔한 물에 따라 그물과 고기 잡는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큰일에는 큰 준비가 필요하고 작은 일에는 그에 맞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작은 일에 지나치게 큰 그물을 짜면 시간과 힘을 낭비하고, 큰일에 작은 그물만 준비하면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형세를 본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일의 크기와 성격, 시기와 조건을 살펴 그 일의 본질을 규정하는 첫걸음입니다.
두 번째는 미리 연마하는 공부입니다. 대산 종사님의 법문에는 ‘연마’라는 표현이 360차례나 등장할 만큼 연마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연마란 돌을 갈고 닦아 빛을 내듯이, 일과 이치를 막힘없이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지혜를 갈고닦아 배우고 익히는 것입니다.
이공주 선진은 대종사님의 법설에서 “미리 연마하라 함은 모든 일을 미리 형세를 보아 준비하라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상시응용주의사항에서 말하는 미리 연마에는, 일이 생기기 전에 일과 이치를 충분히 분석하여 판단하는 지혜의 힘을 기르는 것과 정신·육신·물질의 모든 방면에서 필요한 준비를 갖추는 것이 함께 포함됩니다.
저는 이러한 미리 연마의 표준으로 아버지께서 늘 해 주셨던 당부를 삼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준비하든 항상 제3안까지 마련해 두어라.”
아버지께서는 일이 언제나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므로 제1안만 세우지 말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 사용할 제2안과 제3안까지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그 길이 막히는 순간 마음도 함께 막힙니다. 그러나 다른 길을 준비해 두면 첫 번째 계획이 어긋나더라도 “그러면 다음 방법으로 가면 된다”는 여유가 생깁니다.
제1안, 제2안, 제3안을 준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계획을 여러 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변수가 생겨도 형세에 맞게 대응할 수 있도록 생각의 폭과 마음의 여유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이런 말을 합니다. “Plans are worthless, but planning is everything.” “계획 자체는 무용해질 수 있지만, 계획하는 일은 모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계획이라도 실제 상황이 변하면 수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계획하는 과정에서 목적을 확인하고 위험을 발견하며 여러 대응 방안을 생각해 본 경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대산 종사님께서도 대인은 기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왼쪽이 막히면 오른쪽으로 통하고, 앞이 막히면 뒤로 돌아가며 사통오달의 여유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계획은 바뀌더라도 미리 충분히 연마한 사람은 쉽게 당황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내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고 고집하기보다, 변화하는 형세에 맞추어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심경으로 연마해야 하는지입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변화하는 상황에 쉴 새 없이 대응하다 보면, 문득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눈앞의 일에만 매달려 연마하고 취사하다 보면, 정작 처음 세웠던 목적과 서원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연마할 때에는 목적반조와 서원반조가 반드시 함께해야 합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매 순간 목적과 서원에 비추어 일의 선후와 본말, 주종을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궁글려야 합니다. 대의와 서원이 분명하면 상황이 아무리 복잡하게 변하더라도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를 놓치면 아무리 열심히 준비하더라도 길을 잃고 헤매기 쉽습니다.
지난 8년간 저는 LA에서 바레인으로, 바레인에서 버지니아로, 다시 오키나와와 하와이로 이동했습니다. 네 차례의 국제 이사를 하고 네 척의 배에서 근무했으며, 한국·일본·필리핀의 28개 지역에서 야전훈련을 하면서 수없이 짐을 싸고 풀었습니다.
새로운 장소와 부대, 새로운 인연과 업무, 문화에 적응하면서 “이것이 생사, 곧 전생과 이생과 내생을 오가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짐을 쌀 때면 알 수 없는 상황과 여건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미리 준비한다’는 명분 아래, 불안한 마음으로 미래를 완벽하게 통제하려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해도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하면, 내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타력에 의지해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미리 연마한다는 것은 미래의 모든 변수를 내 뜻대로 통제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미리 연마하는 마음은 내가 할 수 있는 준비에는 정성을 다하되, 그 나머지는 진리에 맡기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 겸허히 받아들이고,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원망하기보다 그 속에서 감사와 배움을 찾는 심경, 이것이 진인사대천명의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대산 종사님께서는 연마할 때 큰 서원을 세우고 심고를 올리며, 그 뜻이 마음과 행동 속에서 살아 움직일 때까지 되새기라고 하셨습니다.
“응용하기 전에 응용의 형세를 보아 미리 연마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결국 이 법문의 뜻은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하거나 모든 실패를 피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떤 형세를 만나더라도 일원의 진리를 여의지 않도록, 내가 해야 할 준비에는 정성을 다하되 결과에는 집착하지 않고 진리에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준비에는 치밀하고, 방법에는 유연하며, 마음에는 여유가 있고, 서원을 끊임없이 키워 나가는 공부인이 되기를 염원합니다.
